세탁소에서 우주까지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미국 이민자 가정의 평범한 일상에서 출발해 우주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독창적인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주인공 에블린 왕은 남편 웨이먼드와 함께 세탁소를 운영하며 끊임없이 밀려드는 청구서와 국세청의 세무 감사, 아버지의 방문, 딸 조이와의 갈등에 시달리며 팍팍한 현실을 견디고 있습니다. 세탁소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 순간 멀티버스라는 상상력의 무대로 전환되며 단순한 개인사를 전 우주적 스케일로 끌어올립니다. 현실의 틀 안에 갇혀 있던 에블린은 다양한 평행우주 속 또 다른 자신과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으며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삶의 가능성과 마주하게 됩니다. 무술 고수, 유명 배우, 셰프, 심지어 손이 핫도그로 된 존재 등 에블린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다양한 삶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전개는 단지 시각적 유희나 코믹한 요소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선택과 그 의미에 대해 되묻게 만듭니다. 수많은 자아 속에서 에블린은 지금 자신의 자리를 돌아보며 억눌려 있던 정체성과 감정을 되짚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영화는 이민자 여성이라는 흔히 조명되지 않던 인물의 시선을 통해 현실의 고단함을 묘사하면서도 그 안에 잠재된 가능성과 생명력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멀티버스는 곧 무한한 ‘만약의 세계’이자 억눌린 욕망의 투영이며, 그 안에서 에블린은 단지 능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감독 대니얼 콴과 대니얼 샤이너트는 이 거대한 세계관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에블린이라는 인물의 감정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 결과 영화는 초현실적인 설정 속에서도 진정성을 유지하며 관객에게 강한 공감과 몰입을 이끌어냅니다. 이는 단지 비주류 서사를 비범한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익숙한 감정의 뿌리를 건드리는 정서적 서사이기도 합니다. 결국 세탁소라는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에블린이 지닌 삶의 무게와 가능성을 동시에 상징하는 무대입니다. 이 작은 공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무한한 우주를 거쳐 다시 한 인간의 내면으로 되돌아오는 구조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버그를 품은 영웅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결핍되고 흔들리며 ‘완벽’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주인공 에블린은 실패한 꿈과 무기력한 일상 속에 묻혀 살아가며 남편 웨이먼드는 나약해 보이고 딸 조이와의 관계는 벽에 부딪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일반적인 히어로 서사에서 기대되는 영웅상과는 거리가 멀지만, 오히려 이 불완전함이 영화의 핵심 주제를 더욱 강하게 뒷받침합니다. 멀티버스 설정을 통해 에블린은 수많은 삶의 가능성과 마주하며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되지만, 그 과정은 혼란과 혼돈으로 가득합니다. 능력을 복사하거나 타 우주의 기술을 가져오는 방식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훈련보다는 충동적이고 우연에 가까운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그녀가 ‘불완전함’을 통해 오히려 진짜 가능성을 마주하게 됨을 암시합니다. 에블린의 가장 큰 전환점은 완벽한 버전의 자신이 아니라 상처 입고 좌절한 자신과의 화해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타 우주에서 무술의 대가나 스타 셰프로 살아가는 삶보다도 현재 이 삶에서 스스로를 수용하는 일이 더욱 어렵고 복잡하다는 점이 강조되며 진정한 성장의 지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환기시킵니다. 남편 웨이먼드 역시 영화가 전개될수록 단순히 유약한 인물이 아니라 ‘친절’을 무기로 삼는 또 다른 형태의 영웅으로 재조명됩니다. 무력으로 맞서는 대신 이해와 배려를 택하는 웨이먼드의 방식은 영화의 정서적 무게중심을 이룹니다. 혼돈을 품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힘은 다름 아닌 사랑과 공감이라는 메시지를 그의 행동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전달합니다. 딸 조이는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존재인 '조부 투파키'라는 캐릭터로 등장해 이 이야기의 또 다른 핵심축을 담당합니다. 그녀는 존재의 무의미함과 세계의 혼란에 절망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이 역시도 우리가 누구나 한 번쯤은 마주하는 감정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화는 ‘영웅’을 정의된 틀에서 꺼내어 결함과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으로 재해석합니다. 결국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영웅들은 완성형이 아니라 성장 중인 인물들입니다. 그들이 품은 ‘버그’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와 수용의 시작점이며, 이를 통해 영화는 보다 현실적인 위로와 감동을 전달합니다.
모든 것의 무게와 아무것도 아님의 가벼움
영화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중심에 둔 작품입니다. 에블린이 수많은 멀티버스를 경험하며 마주하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아무것도 의미 없지 않은가”라는 회의이자 공허함입니다. 멀티버스를 통해 어떤 삶도 선택할 수 있다면 지금의 선택은 얼마나 무의미해질 수 있는지를 영화는 에블린과 조이의 시선을 통해 천천히 풀어냅니다. 특히 딸 조이가 조부 투파키로서 등장하면서 영화는 이 허무의 감정을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모든 멀티버스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결국 어떤 세계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는 무한한 정보와 가능성 속에서 오히려 무기력해지는 현대인의 정서를 은유적으로 반영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 무의미함 앞에서 무기력하게 주저앉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의미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이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제안합니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내 앞의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역설적 진실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강조되며 관객의 깊은 공감을 이끕니다. 에블린은 이 깨달음을 통해 멀티버스 속 모든 자신을 껴안고 결국 현재의 삶으로 돌아옵니다. 그녀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스타 셰프나 유명 가수가 아닌, 세탁소를 운영하며 가족과 살아가는 이 ‘지금의 나’입니다. 이 결말은 의미를 외부에서 찾기보다는 스스로 부여하는 데 있다는 점을 시사하며 영화의 철학을 요약합니다. 감독들은 이러한 메시지를 유쾌하고 기발한 설정 안에 녹여내며 과장된 장면들 속에서도 정서적 진정성을 유지합니다. 우주의 무게와 삶의 공허함을 다룬다는 점에서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그 방식은 무겁지 않고 오히려 자유롭고 경쾌하게 구성됩니다. 결국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세상에서 내가 의미 있다고 느끼는 것을 붙잡는 용기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비록 작고 평범한 것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멀티버스보다 더 크고 강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쿠키 대신 베이글
‘베이글’은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상징 중 하나로 등장합니다. 모든 것을 집어넣은 결과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모든 것이 들어간 베이글’은 곧 무의미함의 상징이며 조부 투파키가 직면한 절망의 시각화를 위한 장치입니다. 이 베이글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이야기의 정서적 중심으로 작용합니다. 조부 투파키는 베이글을 만들어 스스로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이는 멀티버스를 통해 모든 것을 경험하고도 끝내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된 이의 극단적인 선택입니다. 그 안에는 소통되지 못한 외로움과 좌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이는 단지 조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인이 느끼는 총체적 무력감으로 확장됩니다. 베이글과 대조적으로 영화는 종종 쿠키, 눈알 스티커 등 가벼운 상징들을 배치해 대조적인 질감을 형성합니다. 이 중 눈에 스티커를 붙이는 장면은 웨이먼드가 보여주는 ‘삶을 바라보는 방식’의 은유로 기능하며, 무거운 주제 속에서도 유쾌함과 따뜻함을 함께 담아내는 영화의 균형 감각을 보여줍니다. 베이글은 비워낸 상징이며 동시에 집어삼키는 블랙홀로 작용합니다. 반면 웨이먼드가 제안하는 방식은 그 반대편에서 존재의 가치를 ‘채우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세계 앞에서 작은 친절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삶을 마주합니다. 이 대조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명확하게 부각시키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결국 에블린은 조이에게 다가가 함께 베이글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그녀를 다시 꺼내는 선택을 합니다. 이는 무의미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서로를 붙잡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힙니다. 베이글은 그래서 단순한 상징이 아닌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응답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허무함의 베이글 앞에 서게 되지만, 그 순간 서로를 바라보고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이 삶은 결코 공허하지 않다는 점을 영화는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전하고 있습니다.